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문단 편집) == 기타 ==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망향로 국립망향의동산에 [[http://www.nmhc.go.kr/nmhc/_content/content_view.jsp?menu_code=MN01010201#map19|1984년 1주기 당시 세워진 위령탑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 훼손되어 2012년에 보수공사가 실시되었으나 2013년에 [[http://www.ccsimin.com/sub_read.html?uid=37958|마감도 못 한 채 방치된 적이 있었다.]] 특이하게도 관리는 타 시설물과 달리 보건복지부 국립망향의동산관리원이 아닌 대한항공이 맡는다.[* 접근하기가 그리 쉬운 편이 아닌데, 경부고속도로 옆에 있고 천안 지역에서 좀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시내버스로 방문하려면 [[천안 버스 200]], [[천안 버스 201]]을 타야 한다.] || [[파일:KAL007.jpg|width=250px&align=right]] || || KE007 격추 사건 위령비(祈りの塔) || * [[일본]] [[홋카이도]] [[왓카나이시]]의 최북단 [[소야곶]](宗谷岬)에 위치한 소야곶공원(宗谷岬公園)에 이 사고로 인한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인 추도의 탑(祈りの塔)이 서 있다.[* 실제로 사고기에 탑승한 일본인도 한국인과 미국인 다음으로 많았다. 이는 당시 대한항공이 [[일본항공|일본]] [[전일본공수|항공사들]]에 비해 운임이 저렴하여 이 항로를 타고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일본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 사고 희생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앞에서 언급된 래리 맥도널드 하원 의원이다.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 30주년 행사 참석을 위해 지역구가 있는 애틀란타에서 한국으로 갔으면 좋았겠지만 당시에는 직항이 없었기 때문에 뉴욕 JFK 공항에서 대한항공 007편 일등석을 타게 되었다. 사실 그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서울로 가는 [[팬 아메리칸 항공|팬암]]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다시피 007편을 탑승하여 결국 희생당했다. 사고 이후 보궐 선거가 열렸는데, 맥도널드 하원 의원의 아내 캐시가 뒤이어 출마하려 했지만 당 내 경선에서 조지 다든에게 밀렸다.[* 그 후 조지 다든은 5선을 하다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미국 남부 상황에서 결국 공화당에게 내주고 말았다. 2018년 이후 로펌에서 변호사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지역구는 3명의 공화당 의원을 거치다 2021년 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트럼프 때문이다.~~] * 사고 희생자들 중에는 가족 단위 승객들이 많았다. 특히 힘든 동료를 위해 대신 비행기에 탑승하였다가 희생된 승무원, 병상에 있는 노모의 소원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마지막 근무를 위해 이 비행기를 탔다가 희생된 승무원, 두 달 전 부부가 나란히 박사학위를 받고 시어머니의 생신잔치 참석을 위해 4년 만에 귀국하다 희생된 가족, 멕시코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남편의 임기가 끝났으나 짐정리가 늦어져 남편을 1주일 전 먼저 한국으로 보내고 뒤늦게 오다 희생된 가족,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동생의 연락을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러 귀국하다가 희생된 형제, 손녀의 출산을 지켜보고 딸의 산후조리를 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 시어머니가 편찮다는 소식에 귀국하던 길에 희생된 어머니, 한국으로 배치되어 한 달 전 미리 떠난 미군 남편을 따라 귀국하다 희생된 가족들 등 안타까운 사연이 많았다. * 사고 당시 007편은 비행기의 크기나 인명 피해 규모에 비해 의외로 승객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당시 대한항공의 [[보잉 747-200]]의 좌석 수는 1등석 12명, 비즈니스석 24명, 일반석 367명으로, 총 '''403명'''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대한항공은 1등석이 어퍼덱에 있고 비즈니스석이 기수 쪽에 있는 독특한(?) 좌석 배치를 택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당시 007편에 탑승한 '''항공권을 제대로 구매하고 탑승한''' 승객은 245명, 승객으로 탑승한 전체 인원 수는 246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245명 탑승도 공기수송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보통 항공편을 띄울 때의 손익분기점이 좌석점유율이 70% 정도인데 사고편은 61% 정도로서 사고일이 비수기에 해당함을 감안할 때 승객 동원은 그래도 그다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래도 이익이 되는 비행 일정과는 거리가 멀긴 했다. 요약해 보자면 좌석 동원이 좋은 편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아주 공기수송도 아닌 애매한 정도라고 보면 될 듯하다. 1960~70년대에 대한항공의 상황이 어려웠던 이유도 자국민이 비행기를 탈 수가 없어서이던 것이 크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저 시점에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게다가 [[국외여행허가|1983년 저 시절]]에 [[금수저|비행기 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지]] 생각해 보자. 1989년에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그 이전은 해외여행 규제가 엄격하던 시절이었다.[* 정확하게는 5공화국 출범 이후 순차적으로 자유화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나이 제한이 있었고 완전히 해제된 것이 89년이다.] * 승객으로 탄 사람 중 한 명은 비행 스케줄을 끝내고 귀국하던 대한항공 소속 기장 안인수 씨였다고 한다. 사실 앞의 링크에 나오듯이 안씨는 격추당하지 않은 015편의 기장 박용만 씨로부터 "내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겠느냐."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안씨는 "가족 생각이 나서 빨리 가야겠다."라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만약 박씨가 한 번만 더 붙들었거나 안씨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면 참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아천미술관 설립자 류수택의 동생이자 승마선수인 류춘택도 이 비행기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 당시 LA에서 열렸던 프레올림픽 승마대회를 참관하러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직원 두 사람과 함께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었다.] * 당시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던 [[권정달]]도 이 사고로 [[중앙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딸을 잃었다. * 2, 4, 5대 국회의원을 지낸 [[오위영]]의 딸도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오위영 전 의원은 이 사고가 일어나기 5년 전인 1978년 숙환으로 이미 별세한 상황이었다.] * 당시 [[KBS 제2라디오]]에서 [[https://www.joongang.co.kr/article/3498449 |이 사고의 7시간 추모 방송]]을 했던 성우 [[정경애]]는 1997년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남편인 성우 [[장세준]]과 장남 장성민, 차남 장재민과 함께 사망했으며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76475|#]] 그리고 또 이 사고로 희생된 한 승무원의 부인은 14년 후에 발생한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때 조카와 여동생이 희생되어 [[대한항공]]과 원치 않는 악연을 이어가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80700329122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8-07&officeId=00032&pageNo=22&printNo=16181&publishType=00010|되었다.]] * 1991년 3월 24일자 [[동아일보]]에 당시 도쿄 특파원이던 [[이낙연]] 기자가 이 사고에 대한 기사를 보도하기도 했는데 이 기사에 따르면 [[니혼 테레비]]의 시사 프로그램 <더 스쿠프>를 통해 희생자의 유해 일부로 보이는 것들이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32400209204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91-03-24&officeId=00020&pageNo=4&printNo=21423&publishType=00020|공개됐다.]] 그런데 현장 수색에 참여했던 선장과 잠수부들은 이 프로그램 인터뷰에서 "유체는 완전한 게 발견이 안 됐으며 우리도 사진 500여장을 찍었지만 당국에 압수됐다"고 했고 몇몇 잠수부들은 "누군가가 먼저 와서 유체를 치운 듯하다"거나 "수색현장에 온 냉동선은 유체를 운반하러 온 듯하다"고도 했다. 오시포비치도 '''KAL기가 민간기라는 것을 알고 격추'''했다고 하는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7090100209137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7-09-01&officeId=00020&pageNo=37&printNo=23639&publishType=00010|1997년 동아일보 전화 인터뷰]]와 2003년 월간조선 인터뷰에서는 '''몰랐다고 말을 바꿨다.''' 그리고 [[항공 사고 수사대]] 인터뷰에서는 아예 '''나는 아직도 007기가 스파이기였다고 믿는다'''는 뉘앙스의 말을 남겼다. 일단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 나온 전문가들은 자신이 수백 명의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어서 자기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월간조선]]이 이 사건에 대해서 기사를 여러 번 냈다.[* 그 기사들 중에서는 훗날 월간조선 편집장을 지낸 [[조갑제]] 기자가 쓴 기사도 있었다.] 그리고 2003년에는 비행기를 격추시켰던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11100020|오시포비치와 인터뷰까지 했었다.]] 요지는 나는 잘못 없고 미국 정찰기를 잡은 것이고 여객기는 결코 추락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시포비치는 소련 해체 이후 형편없는 대우를 받다가 결국 2015년 9월 23일에 향년 70세로 생을 마감했다. * 동년 1월 8일 007편은 폭탄 테러 미수를 겪은 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기장이 [[나리타 국제공항]]에 긴급 착륙했으며, 샅샅이 수색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폭탄은 없었고, 범인은 정신이상 중국인이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10800209207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1-08&officeId=00020&pageNo=7&printNo=18850&publishType=00020|당시 동아일보 기사]][* 다만 뉴욕을 출발한 것은 비슷했지만 경유지가 앵커리지가 아닌 토론토였고 이 사건에 연루된 기체가 해당 문서의 주인공인 HL7442인지는 불명이다.]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규탄 결의안에 중국이 기권하고 폴란드가 반대한 사실이 일본 정부가 공개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당시 결의안은 안보리 이사회 통과 직전에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결국 채택되지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1/13/0200000000AKR20170113088400073.HTML?input=1195m|못했다.]] * [[아일랜드]] 출신의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가 자신의 1983년도 앨범 의 수록곡 를 통해 이 사건을 비판하였다.[* "러시아인들이 한국으로 향하던 비행기를 격추시켰습니다(The Russians have shot down a plane on its way to Korea.)"라는 가사가 있다.] * 어이없게도 007편이 격추되어 긴급하게 사건이 보도되어야 했던 그날 9시 뉴스에서 다룬 첫 기사는 [[땡전뉴스|전두환이 청진동에 가서 청소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에는 [[보도지침]]에 따라 전두환 소식을 먼저 다루는 것이 보도국 간부들과 양대 방송사 임원진에게 매우 중요한 일로 여겨지고 9시 뉴스 톱에 올리지 못했다면서 기자에게 징계를 내린 시대이기 때문에 007편 격추 사건이 그만큼 긴급 뉴스였음에도 전두환 소식을 먼저 다룬 것이다.[* 다만 조중동과 경향신문 등 종이 신문들은 사건 당일 모두 대한항공 격추 소식을 헤드라인으로 내보냈다. 여담으로 사건 이틀 후인 9월 3일에는 TV 뉴스에서도 이 사건이 헤드라인으로 보도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날 전두환이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참배하고 청와대에서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 북한 역시 KAL007기가 미국이 운용하는 정탐용 항공기이며 인공위성과 [[우주왕복선]]과 연계하여 소련 영공을 침범하다 격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https://blog.naver.com/minjune98/222080968047|#]] * 박용만 기장은 유가족이나 언론에 한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는데 그 때 증언했다면 원치 않는 거짓말을 해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정권]] 시기이기도 하고 민간인 한 명이 [[코렁탕]]을 먹는 것은 그리 어려운 시대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55세로 퇴직 후 인터뷰와 증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 이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방에서는 소련제 항공기 착륙을 금지시키고 국제조종사협회는 보복으로 60일간 모스크바 취항을 중단하기로 하는 등 소련에 대한 분노가 격앙되었다. 또한 앵커리지와 동북아 지역을 횡단하는 R-60항로가 한동안 폐쇄되었다. * 2021년 3월 20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그것이 알고싶다/2021년 방영 목록#s-1.12|방영되었는데]] 예고영상에서 위의 음모론이 잠깐 언급되었다. 다만 결론은 탑승자들의 생존 확률은 매우 희박했으며 이 사건은 그저 각국 높으신 분들의 필요에 따라 이용되며 [[적대적 공생]] 비슷한 구도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게다가 하필이면 사건 한 달 뒤 아웅산 사건이 터지며 한국 정부조차 이 사건에 제대로 관심을 두지 못했고[* 그래도 당시에는 상술했듯 관제 데모였을지언정 규탄식도 벌였고 취학 아동 대상의 반공서적에서도 소련을 비난할 때마다 나온 단골 레퍼토리였다. 정작 유가족들의 입장에선 실질적인 대응이 미흡하다고 느껴졌겠지만 말이다.] 약소국이었던지라 이후 처리에 있어서도 외교적으로 적극적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냉전]] 종식 이후에는 공산권에 대한 유화 정책,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인해 소련에 다시 이 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사후 대책이 흐지부지되어 가는 도중에 한국인 희생자들의 유품들은 제대로 환수된 것이 거의 없었고 돈이 급한 러시아인들과 호사가들에 의해 거래의 대상이 될 정도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음모론자들은 이런 유품들의 사진을 제멋대로 자신들의 주장 맥락에 꿰맞추어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 방송 내용의 요지였다.[* 음모론가들 중 하나인 한 프랑스 작가가 조금만 살펴도 신원을 알아낼 수 있는 한 한국인 희생자 남성에 대해 "그가 스파이 활동과 유관한 게 아니라면 이토록 베일에 싸여 있을 리가 없다."며 "그의 지갑에서 한국인 딸의 사진이 확인된 것을 보아 그는 한국인이며, 미국의 첩보 활동에 이용되었을 것이다. 미국은 첩보 활동에 필요한 현지 언어 전문가를 동원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가정에 가정을 멋대로 이어간 내용이 방송에 나왔다. 정작 2021년 방송에서 생존이 확인된 그 사진 속 딸은 이 내용을 접하고선 평범한 가장이던 자신의 아버지가 졸지에 스파이가 되었다며 황망해했다.] * 이 사건 이후로 1984년 6월 대한항공 항공기가 밝은 파란색 바탕의 신도색으로 바뀌었다.[* 기업의 아이덴티티 변화의 목적도 있었지만 구도색이 해당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